HJB 햄버거 메뉴

목차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어린이용이나 어른용이나 걸리버 여행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적은 없었다. 그나마 알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에피소드인 소인국에 대한 이야기 하나였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걸리버 여행기에서 라퓨타에 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는 것 정도가 더 추가된 사실이었다. 이번에 읽게 된 버전은 문학수첩에서 완역판으로 내놨던 것인데 군대에 있을 때 조금 보다가 말았었다. 당시에 있던 책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었는데 읽다가 지쳐버릴 것 같아서였다. 이번에 우연찮게 정상적인 책을 보게 되었는데 이 책 역시 세월의 영향으로 인해 누렇게 변해있었다. 지하에 있던 책이다 보니 곰팡이 비슷한 것이 있었지만 읽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예전부터 이 책에는 당시 영국에 대한 풍자로 가득 차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실제로 읽어보니 아예 대놓고 당시 영국을 비판하는 것 같았다. 소인국 릴리퍼트, 거인국 브롭딩낵, 라퓨타, 발니바르비, 럭낵, 글럽덥드립, 일본, 그리고 말의 나라 휴이넘이 나온다. 라퓨타나 발니바르비의 얘기는 별로 시사하는 바가 없어 보였다. 라퓨타에서의 이야기도 파고들면 발견할 수 있는 시사점이 있기야 하겠지만 나머지 이야기들에 비하면 그 느낌이 강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행동과 사상이 바뀔 수 있다는 점도 이 책 전반에서 강력하게 시사되는 주제 중 하나인 것 같다. 소인국에 갔을 때는 압도적인 크기를 바탕으로 우월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가 거인국에 가서는 알량한 자존심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해 놀림감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문제는 본인조차도 자신의 처한 상황으로 인하여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는 곳마다 자신의 조국인 영국에 대해 자랑스럽게 소개했지만(어느 나라였던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지만) 결국 그곳 사람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커녕 성공적으로 소개하지도 못했다. 결국 그 나라에서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것을 택한다. 휴이넘의 나라에서는 그런 면이 극에 달한다. 자신과 비슷한 유인원 종족인 야후를 보면서 경멸하게 되는데 휴이넘의 입장에서 보면 걸리버 자신은 약간 다른 야후일 뿐이었다. 휴이넘들의 도덕적 경지를 본받고 싶어서 따라 하였고 걸리버 자신이나 그의 조국이 야후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였다. 몸은 야후인데 정신은 휴이넘을 따라가려고 했고 자신도 휴이넘과 동급이기를 갈망했지만 결국 그곳에서도 쫓겨나는 운명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동족을 다시 만났을 때의 일이다. 휴이넘이 아니면서도 휴이넘의 생각과 같아졌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간을 만나도 야후를 봤을 때의 혐오감을 그대로 느끼게 된 것이다. 원래 자신이 속해있는 영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 적응을 못했다고 기술해 놓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걸리버가 한심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공이 다시 적응하기 힘든 만큼 영국 사회가 썩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걸리버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자신이 속해있는 상황에 따라 착각을 하기 쉬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유리한 상황으로 말이다. 소인국에 있을 때는 자신이 거대하고 강한 존재라고 믿고 있었고 거인국에 있다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신이 남들보다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인국에 있을 때처럼 큰 존재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휴이넘에서 돌아왔을 때는 자신도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람들을 야후와 같은 야만족이라고 생각하며 경멸하였다. 그러면서 고상하다고 여겨지는 휴이넘들을 따라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이 심히 마음에 안들었다.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현실을 외면하면서 남들에게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주의적인 모습만 표현하는 이기주의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당시의 사회 모습에 대한 반발로 그런 인간상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은데 지금 사람들의 생각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 그대로 고전 수준인 것 같다. 이상주의가 가득한 유토피아의 모습에 대해 간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같은데 왠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읽어보면서 재미있는 부분도 꽤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쓸데없는 연구를 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라던가 죽지는 않지만 산송장같이 변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장수와 현실적인 장수의 문제점에 대해서 정확히 서술한 것 같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한 장수가 목표이지 단순히 오래 산다는 것에 대한 고찰은 요즘 들어서 알게 된 개념인데 그 당시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남의 입장을 빌려서 영국을 비판하는 것 자체도 재미있었다.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없는듯한 얘기도 상당히 있었지만 당시의 상황이나 지식인들의 의식 수준을 고려해 본다면 아마도 급진적인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단순히 동화 수준의 작품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당시 사회를 풍자하기 위한 소설이었다는 것을 안 것 자체만으로도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
    위쪽 화살표
    도움이 되었다면 공감(하트)과 댓글을 부탁드려요.
    로딩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