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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수 광부는 허리에 술병을 차고, 강을 건넌다.
    그의 처 영옥은 건너지 말라며 공무도하가를 불렀다지.
    제목을 보며, 누가 어디를 넘어가는 것일까?


    결국 죽음이 갈라놓는 사랑이야길까?하고 생각했다.
    인터넷에 연재되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찔끔거리는 느낌 싫어서 책 나오면 읽어야지 하다가 읽게 되었다.
    연재소설이어서일까?
    김훈 작가답지 않게 겹치는 내용이 두세 번 반복된다. 딱히 그 부분이 반복해서 강조해야 할 부분으로 여겨지지 않아, 인터넷 연재의 흔적일까? 잠시 생각했다.
    사실, 단편 '화장, '언니의 폐경'을 이어 장편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을 두루두루 읽으면서 난 김훈 작가의 팬이 되어 갔다. 특히 칼의 노래에서의 껍질을 벗겨 낸 '사실적인 이순신(전쟁 휴식 중 이를 잡는 장면, 부하들 밥때가 돌아올 때마다 밥때는 밀물처럼 몰려온다는 부담감을 읽을 때의 충격과 감동)'의 묘사에서는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그러면서 접하게 된 그의 산문집은 본격적인 소설만큼이나 밀도 높게 쓰여서 다른 작가의 산문집보다 훨씬 소중하게 곱씹으며 읽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역전이다.
    어떤 작가든 무엇에 기대든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되지만, 문정수, 편집국 차장, 장철수, 심지어 후까지도 '김훈'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불편함이 전권에 걸쳐 드러났다.
    이건 후에 가 아니라, 김훈이야. 이것도 김훈이야... 두 가지 성과 온갖 이름을 가진 자들 속에 숨겨진 혹은 너무 드러난 김훈이 불편했다.
    진화론에 입각한 특별할 것 없는 한 '동물'로서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생존'을 위해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 적 서러운 존재다..라는 명제. 칼의 노래로부터 소재와 시대를 달리할 뿐 변하지 않는 그의 주제의식 혹은 인간관.
    또 하나,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이 책을 읽어도 '김훈'작가의 글임을 너무 안 문체.
    '바다의 기별(산문)'을 읽을 때의 문체와 도구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현의 노래 및 각종 산문에 드러난 표현형의 확장에 대한 그의 생각들.
    물론, 공무도 하라는 제목과 '해방'이라는 지역의 바다와 반복되어 표현되고 있는 노을 등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절한 문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스러졌다가는 다시 일어서고, 일어서면서 사라지고, 스러짐과 사라짐은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합쳐지는 물과 노을.
    그리고, 또 하나.
    그의 글 속에서 그는 진화론자임이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는 만큼, 그는 생물학적인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곤 했는데, 이번 소설에서는 수많은 죽음을 '기자'의 사실에 따라 보고 적어내고 있다. 물론, 문정수가 나는 fact만을 다루고 있지 않음을 알겠다.
    그 부분은 달라진 김훈에 관해 이야기 하겠다.
    청하 지방 수해로 물에 빠져 죽은 죽음, 화재현장 경비원의 죽음, 벼락 맞은 농부의 죽음, 심지어 폭격기의 죽음까지 온갖 죽음이 '공무도 하'에 창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이유가 조금 달려졌다고 해야겠다. 그 이전의 죽음들이 '전쟁'이나, 생물학적인 '자연사(혹은 병사)'가 주를 이루었다면, 이번에 드러나는 죽음은 '해방'의 밤섬에 미군 폭격기지가 만들어지면서 8년 6개월간 지속한 폭격훈련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해방'과 그 속에서 살아가던, 그러나 이제는 떠나야 하거나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개인적 혹은 생물학적인 죽음에서 이제는 '정치와 환경의 문제'로 인한 죽음으로 확장되어(물론 그것이 환경과 결부된다고 해서 삶의 모습은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 적 서러운' 그대로지만) 나타나고 있다. 문명화, 개발이라는 핑계로 자행되는 환경파괴와 그 때문에 벌어지는 생태계의 변화, 거기에서 나타나는 죽음들, 그러나 또 거기에서 생명을 뿌리내리는 사람들.
    타이 길 교수의 '시간 너머로'의 편집자이자 표지디자이너가 된 노목희의 출현은 죽음으로 이루어지던 비루한 삶에 한 줄기 빛을 던지는 매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 연은 황룡사 지가 전쟁 중에 불타 없어진 자리를 보고, 그 사라짐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원형'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타이 길 교수는 이야기한다.
    미술을 전공한 노목희는 그림 그리기에 지속해서 실패를 거듭하지만, 결국 타이 길 교수의 시간 너머 표지를 디자인하면서 다시금 그림을 시작할 용기를 얻고, 마지막 타이 길 교수가 추천한 대학에 유학을 떠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요란 떨지 않고, 담담하게... 인간은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 적 서러운 존재지만, 그럼에도 '원형'에 대해 추구할 수 있는 인간에게 '희망'을 걸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바다의 기별'을 읽으면서부터, 해부학책의 근육 및 조직의 명칭들만을 적듯 차갑고 사실적으로 글을 써 내려가던 작가가 무언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따뜻해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변화가 오려나?
    제목에서 연상한 '죽음이 갈라놓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상상은 혹독하게 깨졌지만,
    다시 김훈을 만나면서 약간의 실망과 또 다른 기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게 되었다.

    어제 읽은 '아나키즘의 이해' 때문일까? 환경문제와 정치에 대한 은근한 혐오(문정식과 편집국 차장의 대화를 통한) 등을 읽으며, 생각하다가.. 아니야... 김훈 작가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믿지 않는 사람이잖아...하려는 찰나, 인간에 대해 희망을 품기 시작한 것이 느껴지며, 이 사람은 아나키스트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슬며 들었다. 아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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