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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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걸쳐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지만 몇몇 작가의 이름은 알고 있고 요시모토 바나나도 그중 하나다. 그렇지만 일단 소설을, 게다가 여성 독자들을 위한 내용이 잘 읽힐 리 없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기회가 닿아 한 번 보게 되었다. 발간일을 보니 한국판이 1998년으로 되어있어 세월이 좀 흘렀네 생각했는데 실제 원작은 무려 1988년에 나왔다. 어째 읽으면서 내용이나 배경이나 구닥다리 같다 느꼈는데 저자의 이름이 알려졌던 때와 데뷔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 안에 세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있고 앞의 두 편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일단 읽어본 후의 소감은 내가 예상보다 매우 건전하다는 점이었다. 가족들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빠진 두 남녀가 순수한 감정 교류를 통하여 서로를 보듬어가면서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잘 묘사했다. 제일 강조하고 싶은 항목은 순수한 정신적 연애 감정의 묘사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두 이야기 모두 주인공들의 상황이나 주변인물들이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가족을 모두 잃어 갈 곳 없는 여자주인공과 단지 여주인공의 할머니와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집에서 살라고 선뜻 부르는 남자주인공, 그리고 태생은 생물학적 남자였고 한때는 아빠였지만 지금은 남자주인공의 엄마역할을 하는 트랜스젠더가 등장한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남자친구를 잃은 여자주인공, 남자친구의 동생이면서 자신의 여자친구도 동시에 잃은 세일러복 복장도착자 남자주인공, 그리고 마치 신기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여자까지 일반인들이 보기에 납득하기 어려운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역설적으로 이들에게서는 성적인 접촉이나 기괴한 행동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서로를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대화들만 등장할 뿐이다. 특이한 등장인물들이 독자들에게 관심을 받기 위한 장치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실제 대화 내용이나 스토리의 흐름은 사람들이 꿈꾸는 전형적인 플라토닉 러브의 진수를 보여준다.
솔직히 스토리 자체에 푹 빠져서 몰입해서 봤느냐고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말하겠다. 그보다는 읽는 내내 특정 상황에서 덧붙여진 설명들이 내가 여태까지 봐왔던 상식들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더 신경 쓴 것이 사실이다. 특정 주제의 학술 서적과 분석적 독서에 익숙해져서 그런 모양이다. 나름대로 덜 생각하고 느끼려고 노력했는데 생각보다 그게 잘 안되었지만 예상보다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글이 쉽다고 쉽게 읽히진 않는다. 이 책도 쉬운 내용이지만 내가 잘 느끼지 못하는 부분들을 고려하면서 보니 다른 의미로 어려웠었다.
핵심 요약 :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가며 회복해가는 순수한 사랑 이야기
p.s
1. 솔직히 말하면 제목에서 말하는 키친, 즉 부엌이라는 장소가 스토리 흐름에 있어 그다지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진 않다. 물론 남자주인공이 심적으로 많이 힘들 때 여자주인공이 과거의 활기를 되찾아주기 위해 부엌을 빌려 요리를 해주는 상황이 나오긴 한다. 그런데 내가 느낀 것에 비해 다른 독자들은 그 상황이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봤을 수도 있을 텐데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제목이 키친이라 요리장면이 굉장히 화려하게 묘사될 줄 알았는데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을 이어주는 역할만 맡아서인지 생각보다 단순하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