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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없는 사회에서 충분한 학습이 이루어지기 위해 '인간관'은 어떠해야 하는가?하고
    어제 의문을 품었었다.


     일리히는 아래의 시를 인용하여 '탈학교 사회'에서의 인간에 대한 답을 대신한다.
    물론 판도라 및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의 탄생이라는 '그리스신화'에 빗대어 여러 가지를 하지만,
    압축해서 보자면 아래의 시가 그 대답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흥미롭다.
    사람의 운명은 별들의 운행과도 같다.
    사람마다 그 나름대로 독특하다.
    별들 하나하나가 다른 것처럼.
    지구 위에서 서로가 만날 수 있고, 그 지구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붙여줄 필요가 있다.
    사람이 어둠 속에 살고 있으면서, 그 속에서 친구를 얻는다면, 어둠도 또한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붙여줄 이름이 필요하고 있다. 그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아우와 협력해서 불을 붙이고 쇠를 다지는 것이나, 그 목적은 타인의 옆에 붙어서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자기들을 위 능력을 향상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자기 혼자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 속에서의 즐거운 한 때,
    그 세계 속에서의 슬픈 한 때,
    이 모든 것이 자기 혼자의 것이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는 탈학교에서의 학습이 이루어지는 네트워킹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도시의 관계자 외에 개방을 금지한 모든 곳과, 모든 사물이 학습의 재료가 되고,
    같은 주제의 학습을 원하는 사람들 간의 네트워킹이 형성되고,
    이들이 조금 더 전문적인 기능 및 내용에 대해 지도를 받고자 할 때는, 전문 기능인과 연장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네트워킹에서 선택하고, 자유로이 토론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지식'은 습득이 아니라 사회성원에 의한 '구성'이다...라는 전제가 떠오르며,
    앞으로 지향해야 할 학습의 방향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과연 이미 제도화되고, 기득권을 가진 전문가 연하는 사람들이 그 기득권을 포기하고,
    오히려 더욱 열린 공간 속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것에 설득당할 것인가?
    상당 부분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저술 후 4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이 주장은 어디까지 이루어졌으며 어디까지가 비현실적인가? 아니, 시간이 흐르면 가능할 수 있는... 그야말로 주류의 주장이 될 수 있을까? 문명의 발전속도가 어쩌면 인간을 파괴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 본성을 파괴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크게 공감하면서도, 이기적인 인간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게 할 만큼 설득 적일 수 있을 지, 그것이 문제로다.
     일리히의 탈학교 이후의, 탈학교에 대한 논의가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 관련 서적을 또 찾아봐야겠다.
    즐거운 독서였다.

    * 우리 아이들, 학교 없는 사회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와 진짜 좋은 사회다.'라고 외친다.
    녀석들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틀 속에 갇힌 상태,
    누군가는 지시하고, 아이들은 따라야 하는 그 상태가 사실 자연스럽지 못한 모양이다.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자연스럽고도 효과적인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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